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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토 지하철 가라스마선 (烏丸線) 의 이마데가와역 (今出川駅) 에서 약 800 m 서쪽으로 떨어진 곳에 호리카와이마데가와 (堀川今出川) 라는 교차로가 있고, 그 남서쪽 모퉁이에는 니시진오리 (西陣織) 라는 직물 판매를 위해 세워진 니시진오리회관 (西陣織会館) 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조금 남쪽으로 아베노-세이메이 (安倍晴明) 를 모시고 있는 세이메이신사 (晴明神社) 가 오른쪽에 있습니다.

 

  아베노-세이메이는 평생 궁정에서 활약한 음양도 (陰陽道) 의 달인이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적도 있는데 그는 하시히메 (橋姫) 라는 악령을 우지강 (宇治川) 으로 뛰어들게 했을 뿐만 아니라 치코 (智興) 라는 고승의 심각한 병을 제자 쇼쿠 (証空) 에게 옮겨가도록 했다고 하는 인물입니다.

  경내에는 오각별 (五角星) 이라는 신비한 힘을 가진 문양을 상부 표면에 새긴 우물이 있는데 소문에 따르면 그 상징은 악령이 그 신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 준다고 합니다. 그 우물 앞의 지면에는 북두칠성의 무늬가 그려져 있어서 그 별무늬를 한걸음 한걸음 밟으면서 따라걸으면 신비한 능력을 얻게 된다고 전해져 옵니다.

  가장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기념으로 경내에 세워진 작은 다리입니다. 근처에 흐르고 있는 호리카와 (堀川) 라는 강에 세워졌던 이치죠모도리바시 (一条戻り橋) 라는 다리가 낡아져서 재건하게 되었는데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철거될 때 낡은 재료의 일부를 이용해서 재현했다고 합니다.

  지금의 다리 이치죠모도리바시라는 이름은 당시 유명한 한문 학자인 미요시 기요유키 (三善 清行) 가 죽은 후 그의 장례행렬이 그 다리를 건너가던 중에 일어난 일에서 지어졌다고 합니다. 기요유키가 죽었을 때 그의 아들 조조 (浄蔵) 는 지금의 와카야마현 (和歌山県) 에 있는 구마노산 (熊野山) 의 깊은 산속에 틀어박혀 수행에 정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소식을 듣자마자 황급하게 교토시내로 돌아왔고 그 다리 위에서 장례행렬이 막 지나가고 있을 때 겨우 따라잡을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조조는 관에 올라타서 작별 인사 대신에 불경을 큰 소리로 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멀리서 천둥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돌연 관의 뚜껑이 튀어오르면서 그 안에서 아버지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서로 얼싸안고 울었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영혼이 그 다리 위에서 이승으로 잠시 돌아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다리를 이치조의 지명과 함께 모도리 (돌아오다), 그리고 바시 (다리) 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결혼행렬인 경우는 신부가 친정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을 피하고 싶다면 그 다리를 통과하지 않는 게 좋다고 합니다. 또한 장례행렬도 죽은자를 저승으로 편안히 보내고 싶다면 그 다리를 건너지 않도록 한다고 하는데 가령 죽은 자가 이승으로 돌아오더라도 곧 저승으로 다시 가야하므로 그때에 느낄 이별의 슬픔이 더 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군대 가기 직전의 젊은이들은 고향에 무사히 돌아올 수 있기를 빌면서 그 다리에 모였다고 합니다. 그렇듯 "돌아오다" 라는 의미를 사람들은 그 다리를 통해 여러 가지로 해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에도시대 (江戸時代 1603-1867) 사형이 집행되는 죄인들을 언제나 같은 길을 지나 시내 북부에 위치한 츠보이쵸 (壺井町) 에 있는 처형장으로 데려갔다고 합니다. 그때 시죠오미야 (四条大宮) 근처에 있는 로까쿠고쿠샤 (六角獄舎) 라는 감옥을 떠나 이치죠모도리바시에서 떡을 먹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이치죠모도리바시에서 죄인들은 다시 한번 이 세상으로 돌아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수 있기를 빌면서 마지막 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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