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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요미즈데라 경내에 있는 에조라 불리던 일본 원주민 두명의 비석

기요미즈데라 (清水寺) 의 경내에는 볼 거리가 무수히 있음에도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모르고 지나쳐버리는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 하나가 본당 아래 출구 바로 앞에 서 있는 비석입니다. 돌의 표면을 도호쿠지방 (東北地方) 의 지도 모양으로 파서, 그 안에 아테루이와 모레라는 두 남자의 이름을 새겨놓았습니다. 그들은 지금의 홋까이도 (北海道) 와 도호쿠지방에 정착해 살고 있었는데 당시에는 에조 (蝦夷) 라 불리던 일본 원주민으로 아이누족의 군사 지도자였습니다.

  그 비석이 세워지게 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는 사카노우에 다무라마로 (坂上田村麻呂) 는 같은 경내의 다무라도 (田村堂) 라는 당 안에 모셔져 있습니다. 그는 서기 797 년 천황에 의해 세이이타이쇼군 (征夷大将軍) 으로 임명되었는데 그 직함은 당시 "원주민 에조를 정복하기 위한 군대의 우두머리" 를 의미합니다. 가마쿠라시대 (鎌倉時代) 가 되고 나서 비로소 쇼군 (장군) 은 나라의 지배자라는 의미가 생겼습니다.


기요미즈데라 경내에 있는 에조라 불리던 일본 원주민 두명의 비석

 

  헤이안시대 (平安時代) 초기 도호쿠지방 원정은 에조 전투부대의 탁월한 게릴라 전술로 인해 실패을 거듭했습니다. 그래서 천황은 전쟁이나 반란에 대응할 수 있고 임기응변에 강한 다무라마로를 세이이타이쇼군으로 임명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에조와 정면으로 싸우는 것을 피하고, 온화하게 그들에게 다가가는 전술을 썼는데 최신 농경기술부터 불교까지 도호쿠지방으로 도입시켰습니다. 점점 다무라마로를 신뢰하는 에조 민중이 늘어났습니다. 적당한 시기를 노려 그는 에조의 본거지인 이자와 (胆沢) 에 전략 거점인 이자와성 (胆沢城) 을 쌓았고 막대한 수의 병사로 이루어진 군대를 그 성으로 파견해서 아테루이와 모레가 이끄는 500 명의 부대를 진압했습니다. 결국 아테루이와 모레는 모든 부대원들과 함께 자신들을 처형하지 말라는 조건으로 항복했습니다.

  서기 802 년 다무라마로는 두 사람과 같이 교토로 돌아가서 천황과 귀족에게 간청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정직해서 에조 민중으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기 때문에 도호쿠지방의 관리는 그들한테 맡기는 게 좋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진언을 듣지 않고 그 둘을 오사카 (大阪) 로 데려가 목을 잘라버렸습니다.

  그들의 처형은 에조와의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으로 그 후에도 정부는 도호쿠지방으로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하지만 재정이 점점 핍박해져서 그 지방의 정복이 미완성인 상태로 남게 되었고 에조 민중 안에서도 일본 정부에 항복하는 사람도 있고 반항을 계속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한 다무라마로를 미워하는 점에서는 모두 일치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도호쿠지방은 일본에 흡수되어 갔고, 다무라마로가 두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정보도 에조 민중 사이로 퍼졌습니다. 그래서 서기 1994 년 교토시 탄생 1200 주년 기념식이 열렸을 때 이자와지구의 에조 자손들이 기요미즈데라에 일본과 에조의 화해의 상징으로서 비석을 세우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고 합니다. 물론 기요미즈데라의 승려들은 기꺼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기요미즈데라 경내에 있는 다무라도라는 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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