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지하철 도자이선 (東西線) 오노역 (小野駅) 근처에는 두 채의 몬제키 (門跡) 라는 절이 있는데, 서쪽에는 가즈지 (勸修寺) 가 동쪽에는 즈이신인 (随心院) 이 있습니다. 몬제키의 큰스님이 황족 출신이라서 여러 가지 문화적, 경제적인 지원을 천황에게서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경내 전체가 우아하고 호화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절들에는 각각 재미있는 사랑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헤이안시대 (平安時代) (794 - 1185) 에 다카토 (高藤) 라는 15살짜리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후지와라노후유츠구 (藤原 冬嗣) 라는 당시 일본을 지배했던 사람의 손자였습니다. 그는 매사냥을 하러 교토시내에서 히가시야마 (東山) 를 넘어 야마시나 (山科) 까지 갔습니다.
그때 갑자기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바람에 그는 산속에서 길을 잃고 말았지만 고생끝에 간신히 대저택을 찾을 수 있었고 그곳에서 비와 바람을 피했습니다. 그 저택은 야마시나 지방을 다스리던 관리의 것으로 그에게는 13살짜리 딸이 있었는데 그녀의 빼어난 미모가 다카토를 매료시켰습니다. 어쩌면 그와 그녀가 같이 하룻밤을 보낸 것은 운명과 같은 흐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젊은이들의 사랑이 표면적으로는 순수하게 보이지만 그 속에는 지방관리의 교활한 의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방관리의 딸과 그 젊은이의 결혼을 통해 귀족계급과 친척관계가 되면 더 큰 권력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날 다카토는 그녀에게 자신의 일본칼을 약혼의 증거로 주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그가 너무나 늦게 돌아왔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가 화를 내면서 두 번 다시 야마시나로 매사냥을 하러 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결국 다카토가 야마시나로 다시 갈 수 있게 된 것은6 년 후였습니다. 그는 그 대저택에서 여전히 아름다운 다마코 (列子) 그리고 5 살짜리 딸인 다네코 (胤子) 와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약속대로 다마코와 결혼했습니다.
후에 다카토는 나라의 중요한 자리에 앉았고 그의 딸인 다네코도 우다천황 (宇多天皇) 의 첩으로서 훗날에 다이고천황 (醍醐天皇) 이 되는 아기를 낳았습니다. 지방관리의 대저택은 몬제키 절인 가즈지 로 개축되어 황족과 후지와라족에게서 막대한 지원을 받으면서 지금까지 번영해 왔습니다.
다카토의 자손들 중에 겐지모노가타리 (源氏物語) 를 쓴 무라사키시키부 (紫 式部) 가 있는데 야마시나 지방관리의 교활한 의도가 없었다면 그 유명한 문학작품도 현재의 천황도 지금 존재할 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