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한전철 (京阪電鉄) 시치죠역 (七条駅) 에서 내려 시치죠대로 (七条通) 를 따라 동쪽으로 약 300 m 가면 야마토오지 (大和大路) 와 교차하는 사거리가 있고 그 앞에 산주산겐도 (三十三間堂) 건너편에 서양식 벽돌로 지어진 교토국립박물관 (京都国立博物館) 이 있습니다. 그 박물관 바로 북쪽에는 아즈치모모야마시대 (安土桃山時代) 의 장군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 가 모셔져 있는 도요쿠니신사 (豊国神社) 의 경내가 펼쳐져 있습니다. 그 앞에는 미미즈카공원 (耳塚公園) 이 있고 그 뒤 5 m 언덕 위에는 미미즈카 (耳塚) 즉 귀무덤 또는 하나즈카 (鼻塚) 즉 코무덤이라 불리는 5 층 석탑이 서 있습니다.
그 언덕 안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침략했을 때 일본 무사들에 의해 죽은 조선인들의 귀와 코가 묻혀있다고 합니다. 당시 무사들은 전쟁시에 자기의 공을 증명하기 위하여 적의 목을 베어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무거운 머리를 바다 건너 일본까지 가지고 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어서 대신 귀를 가지고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귀 두 개로 적을 두 명 죽였다고 속이는 무사들도 있었기 때문에 적을 몇 명 죽였는지 정확하게 세는 것이 어렵게 되자, 그 후로부터 코로 대신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무사들 전원에게 한 사람당 적어도 세 사람의 코를 가져오게 했고 만약 그들이 명령을 달성하지 못했을경우에는 큰 벌을 주기까지 해서 그 극형을 피하기 위하여 심지어 일반 민중까지 죽였다고 합니다. 귀와 코는 조선에서 확인해서 수를 센 후에 소금에 절여서 통에 담아 일본까지 운반했다고 합니다.
그런 통이 열다섯 개나 되었고 전부 합하면 십만개의 귀와 코가 들어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묻어야 했기 때문에 결국 곧 높아졌고 언덕이 되어버려서 ‘귀 무덤’ ‘코 무덤’ 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교토 시내에 있는 모든 절의 스님들을 그곳으로 모아서 기도하게 했습니다. 당시 그 사실을 강조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미화하여 도요쿠니신사까지 지어 그를 신격화해 놓았습니다.
수 많은 조선 사람들의 귀와 코가 묻혀 있는 곳에 그런 명령을 한 사람을 위하여 신사를 지어 신으로 모시고 있는 것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교토시가 세운 한국어 게시판을 소개하겠습니다.
사적 호코지 (方廣寺) 절 석축 및 석탑 (1969년 4월 12일 지정)
귀 무덤 (코 무덤)
이 무덤은 16세기말 일본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 가 대륙 진출의 야심을 품고 한반도를 침공한 이른바 분로쿠 (文禄) 게이초 (慶長) 의 역 (役) (한국역사에서는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1592-1598년) 과 관련된 유적이다.
히데요시 휘하의 무장들은 예로부터 전공의 표식이었던 적군의 목 대신에 조선 국민 남녀의 코나 귀를 베어 소금에 절여서 일본에 가지고 돌아왔다. 이러한 전공품은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이곳에 매장되어 공양의식이 거행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귀 무덤 (코 무덤) 의 유래이다.
귀 무덤 (코 무덤) 은 사적 오도이 (御土居) 토성 등과 함께 교토에 현존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관련 유적중의 하나이며, 무덤 위에 세워진 오륜 석탑은 1643년에 그려진 그림지도에도 이미 그 모습이 나타나 있어 무덤이 축조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창건되었다고 추정된다.
히데요시가 일으킨 이 전쟁은 한반도 민중들의 끈질긴 저항에 패퇴함으로서 막을 내렸으니 전란이 남긴 이 귀 무덤은 전란하에 입은 조선민중의 수난을 역사의 교훈으로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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